美 지역은행 사태로 생긴 ‘벤처 대출’ 시장 공백, 새로운 먹거리 찾아 뛰어드는 ‘대형 금융사들’

대형금융사들, 시장 유동성 위기 역이용해 ‘벤처 대출’로 사업 확장 블랙록, 기술 및 의료 분야 벤처 대출 플랫폼 크레오스(Kreos) 인수 국내서도 정부가 나서 ‘벤처 대출’ 공급 확대 발표, 시장 활성화 예고

혹한기를 맞은 글로벌 벤처투자 시장에서 ‘벤처 대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특히 블랙록 등의 대형 금융사가 스타트업에 자금조달을 해왔던 미국 지역은행들의 역할을 대체하기 위한 투자를 감행한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에서도 금융당국의 벤처 대출 공급 확대 발표가 잇따르는 가운데, 벤처 대출 제도화 등에 따라 향후 벤처 대출시장이 활성화될 거란 주장이 나온다.

성장하는 글로벌 벤처 대출 시장, 대형 금융사도 경쟁

지속되는 고금리 여건 속에서 글로벌 스타트업들이 자금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특히 미국 지역은행들의 유동성 위기가 스타트업 투자 환경을 더욱 위축시켰다. 시장조사기관 피치북(PitchBook)에 따르면 올해 1분기 벤처 투자금은 790억 달러로, 전년도 1,780억 달러보다 절반 넘게 줄었다.

유동성 위기에 놓인 스타트업들은 차선책으로 ‘벤처 대출’을 택하고 있다. 벤처 대출은 은행 등 대출 기관이 벤처기업에 저리로 돈을 빌려주는 대신 후속 투자 유치 시 대출금과 지분인수권 일부를 확보할 수 있는 융자상품이다. 미국 실리콘밸리식 투자조건부 융자상품으로도 불리며 최근 파산한 실리콘밸리은행(SVB) 그룹의 주요 사업모델이기도 하다.

어려워진 자금조달 환경 속에서 기업가치를 유지하고 싶은 스타트업들은 벤처 대출을 적극 이용했다. 피치북에 따르면 지난해 상반기 미국 벤처 대출 규모는 171억 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7.5%나 늘었다. 2012년부터 2022년까지 벤처 대출 거래량은 총 거래 가치 67억 달러에서 312억 달러로 증가했다.

다만 올해 SVB 파산 사태로 지역은행들의 대출 태도가 강화되면서 벤처 대출 시장이 위축되자, 대형 금융사들이 이틈을 타 벤처 대출 사업 확장에 나서기 시작했다. 지역은행들의 역할을 대체함으로써 금융시장과 스타트업의 유동성 위기를 역이용하겠다는 의도다.

사진=블랙록 공식 홈페이지

중소 대출기관 인수해 벤처 대출 사업뛰어든다

세계 최대의 자산 운용사 블랙록(Blackrock)은 벤처 대출 사업에 새롭게 뛰어들고 있는 대표적인 대형 금융사다. 지난 8일 블랙록은 기술 및 의료 분야 벤처 대출 플랫폼 크레오스(Kreos)를 인수했다. 피치북에 따르면 크레오스의 기존 대출은 약 56억 달러로 750건 이상이 넘는 대출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크레오스는 초기 및 성장 단계 벤처 기업들을 위한 특정 유형의 대출인 벤처 대출에 특화된 플랫폼이다. 블랙록 관계자는 “현재 벤처투자 시장은 사모 대출을 통해 수익성 개선 및 포트폴리오 다변화와 같은 강점을 누릴 수 있다”면서 “앞으로도 벤처 대출과 사모 대출에 대한 투자자들의 수요가 높을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전문가들은 블랙록의 이 같은 행보가 지역은행 사태로 벤처 대출에 내려진 부정적인 평가를 뒤집어 놓았다고 설명한다. LA 기반 벤처캐피털 Applied Real Intelligence의 관계자 잭 엘리슨은 “블랙록이 크레오스를 인수하는 것은 세계에서 가장 큰 자산 운용사가 벤처 대출에 대한 믿음을 드러낸다”면서 “본질적으로 고수익과 고객들에게 더 많은 선택지를 제공하고자 하는 다른 금융사들도 곧 따라서 시작할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블랙록 외 다른 금융사들도 벤처 대출 사업에 뛰어들고 있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세계 최대 사모펀드 운용사 블랙스톤(Blackstone)은 향후 수년간 벤처 기업에 대한 대출에 약 20억 달러를 투입할 예정이다. 이 밖에도 케이케이알(KKR&Co.)이나 베인캐피털(Bain Capital)과 같은 헤지펀드들도 벤처 대출 사업을 확대하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홍콩상하이은행(HBSC), JP모건체이스(JP Morgan Chase) 등 은행권에서도 SVB의 직원들을 대거 영입하며 벤처 대출 시장에 적극 뛰어들고 있다.

에이블리등 국내서도 벤처 대출 활용 사례 늘어

미국에서부터 활성화된 벤처 대출은 아직 국내에선 낯선 개념이다. 다만 국내에서도 지난 3월 벤처 대출 제도화를 골자로 하는 벤처투자촉진법 개정안이 가결됨에 따라 향후 벤처 대출 시장이 활성화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최근에는 국내 여성 패션 플랫폼 에이블리가 벤처 대출을 받으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에이블리는 지난 3월 PEF 운용사 파인트리자산운용으로부터 500억원 규모의 벤처 대출을 받으면서 유니콘 라운드까지의 사업 자금을 마련한 바 있다. 국내 벤처투자 시장의 혹한기 속에서도 거금을 마련한 에이블리는 유동성 위기를 돌파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금융당국도 벤처 대출 공급 확대를 언급했다. 김주현 금융위원장은 지난 1일 벤처·스타트업페어 ‘넥스트라이즈 서울 2023’ 축사에서 “창업에 성공한 우수기업이 데스밸리를 극복할 수 있도록 벤처 대출 공급을 확대해 가겠다”면서 “창업 초기기업에 시드머니 제공을 위해 기업은행에서 1,000억원 규모 전용펀드를 신규 조성하고, 신용보증기금을 통해 초기기업 대상 특례보증도6,000억원 규모로 추가 공급하겠다”고 밝혔다.

벤처투자촉진법 개정안이 제도화와 함께 정부의 지원까지 발표되면서 본격적인 벤처 대출 활성화가 예고된다. 업계에서도 시장 전반이 경색된 상황 속에서 새롭게 추가된 자금조달 방식에 긍정적인 입장이다. 기존의 벤처 대출 사례가 원만히 진행되어 SVB 사태 속에서도 추진된 벤처 대출 제도화와 시장 활성화에도 탄력이 붙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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