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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RA 투자’ 타고 날아오른 국산 배터리 장비, 중국산 ‘맹추격’ 따돌릴 수 있을까

미국 IRA에 북미 투자 늘린 배터리 업체들, 장비 업계 '활짝'
대다수 업체 실적 '초록불', 올해 실적에도 기대 실려
빠르게 치고 올라오는 중국 장비, 차별화 실패하면 밀린다
전기차_배터리_달러_20240112

경기 침체로 산업계 전반에 ‘혹한기’가 들이닥친 지난해, 국내 배터리 장비사들이 두드러지는 성장세를 기록한 것으로 확인됐다. 11일 금융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는 국내 배터리 장비 업체 대다수가 지난해 역대 최고 수준 실적을 달성했다는 분석을 내놨다. 미국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의 영향으로 국내 배터리 업체의 북미 투자가 급증하는 가운데, 배터리 장비 업체 역시 반사이익을 누린 것으로 풀이된다.

전년도 배터리 장비 업체 실적, 줄줄이 개선세

국내 배터리 전극·조립 분야 기업들은 지난해 눈에 띄는 성장세를 기록했다. 전극 공정 업체 피엔티의 지난해 매출 컨센서스(실적 전망치)는 5,573억원에 달했다. 이는 전년 대비 33% 증가한 수치자 피엔티의 연간 최대 매출이다. 조립공정 업체인 엠플러스의 지난해 매출은 2022년 대비 3배가량 증가한 3,000억원 선으로 추산됐다. 또 다른 조립공정 업체 하나기술의 매출은 2022년 대비 63.7% 증가한 1,864억원으로 전망됐다.

이외 장비 분야도 뚜렷한 성장세를 보였다. 활성화 공정 업체인 에이프로의 지난해 매출액은 1,818억원으로 추산된다. 이는 지난 2022년 대비 129%가량 급증한 수준이다. 물류 장비 생산 업체인 코윈테크의 지난해 매출 역시 전년 대비 69.5% 급성장한 것으로 전망된다(컨센서스 3,409억원). 이차전지 물류 장비, 전극공정 장비 등 다양한 사업을 영위하는 에스에프에이는 지난해 1조7,472억원에 달하는 매출을 올린 것으로 추정된다.

장비 업체 대다수가 최대 수주 잔고를 줄줄이 경신하는 가운데, 업계에서는 이들 업체의 올해 실적에도 기대를 싣고 있다. 아직 미반영된 잔고들이 올해 본격적으로 실적 개선세를 견인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실제 지난해 눈에 띄게 실적이 개선되지 않았던 전극공정 업체 씨아이에스의 경우 8,000억원 이상 수주잔고가 올해 하반기부터 매출에 본격 반영될 예정이다.

해외 시장 공략으로 성장세 박차

이들 기업의 실적 상승세를 견인한 것은 미국 IRA에 따른 국내 배터리 제조사들의 투자 확대다. LG에너지솔루션, SK온, 삼성SDI 등 국내 배터리 업체들은 IRA 수혜를 위해 앞다퉈 미국 시장 투자를 확대해 왔다. 현재 현대차그룹은 55억 달러(약 7조2,000억원)를 들여 미 조지아주에 전기차 전용 공장 ‘ 현대차그룹메타플랜트아메리카(HMGMA)’를 짓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은 HMGMA, 현대차·기아 등 미국 현지 완성차 공장에 공급할 배터리를 생산하기 위해 현대차와 5조7,000억원을 공동 투입, 합작 공장을 신설 중이다.

SK온은 현대차와의 배터리 합작 공장 건설에 총 6조5,000억원에 달하는 대규모 자금을 투입할 예정이다. 삼성SDI도 스텔란티스·GM과의 합작 공장 설립에 약 12조원을 투자한다. 이들 배터리 기업은 IRA를 기회로 삼아 미국 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출, 현지 수요를 본격적으로 흡수하고 있다. ‘반드시 50% 이상의 부품을 북미에서 제조·조립해야 하고, 중국산 핵심 광물과 부품을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는 IRA의 보조금 지급 조건을 사업 확대의 기회로 이용한 셈이다.

전기차_배터리_국산_20240112

국산 배터리 장비는 일본 시장에서도 두각을 드러내고 있다. 성능과 가격 경쟁력 부문에서 일본·중국 장비사를 압도, 일본 배터리 셀 제조사 납품에 줄줄이 성공한 것이다. △씨아이에스 △피엔티 △이노메트리 △엠플러스 △민테크 등 수많은 배터리 장비 기업이 일본 현지 배터리 기업에 제품을 수출하고 있다. IRA 시행으로 인해 중국 장비 사용에 제약이 걸린 만큼, 업계에서는 차후 각국의 국산 배터리 장비 수요가 한층 증가할 것이라는 전망에 힘이 실린다.

성장 관건은 ‘중국 제품’과의 경쟁?

다만 눈에 띄는 실적 개선세가 관측됐음에도 업계에서는 이들 기업의 미래 전망에 대한 우려를 제기하고 있다. 중국 장비 시장과의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중국의 배터리 장비 제조사 항커커지(杭可科技)는 지난해 초 SK온-포드 전기차 배터리 합작사 ‘블루오벌SK’와 1억4,600만 달러(약 1,800억원) 규모의 배터리 후공정 장비 계약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2011년 설립된 항커커지는 배터리 후공정인 활성화 장비를 주력으로 하는 회사다. CATL과 BYD, EVE에너지, 궈시안 등 중국 업체는 물론, LG에너지솔루션, 삼성SDI 등 글로벌 배터리 회사들에도 장비를 납품한 이력이 있다. 한국 업체 대비 60%가량 저렴한 가격을 무기로 시장 영향력을 확보한 것이다. 항커커지는 현재 비츠로와 HK파워를 설립, 본격적으로 국내 시장에 침투한 상태다. 깊어지는 미-중 갈등을 회피하기 위해 우리나라를 일종의 ‘수출 우회로’로 점찍은 것이다. 한국 기업과 협력하면 장비 제품을 한국산으로 인정받을 수 있어 유럽과 북미 시장 진출이 쉬워진다.

수많은 중국 장비 기업이 항커커지와 같은 ‘한국 진출’ 전략을 수립하고 있다. 전극, 조립, 화성 등 배터리 제조에 필요한 장비 전반을 제작하는 중국 최대 배터리 장비 업체 ‘선도지능장비’는 우리나라에 지사를 설립, 국내 장비사와 직접 경쟁하고 있다. 또 다른 중국 장비사인 잉허커지, 리릭로봇도 한국에 지사를 세우거나 국내 기업과 합작사를 만들었다.

이처럼 중국 정부의 지원을 등에 업은 업체들이 가격 경쟁력을 무기로 점유율 확보에 나설 경우, 한순간에 국내 장비 업계의 판도가 달라질 수 있다. 이렇다 할 차별화를 이루지 못하면 지금의 가파른 성장세가 순식간에 꺾일 위험이 있다는 의미다. 배터리 장비 업계의 아슬아슬한 ‘황금기’는 어디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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