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큰 러시’ 시대 도래에 기대감 앞세운 업계, “거위 배 갈라선 안 돼”

금융당국, STO 전면 허용 방침 밝혔다
스타트업 업계서 기대감 '급증', "돈맥경화 뚫릴 듯"
진전없는 ST 제도화, 업계서부터 인프라 형성 노력 이어야
래리-핑크
블랙록 CEO 래리 핑크의 모습/사진=블랙록 홈페이지 캡처

금융당국이 토큰증권발행(STO) 전면 허용 방침을 밝히면서 금융업권에 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레이스가 시작됐다. 이에 따라 토큰증권(ST·Security Token) 시장이 급격히 성장하면서 스타트업의 새로운 ‘젖줄’이 탄생할 수 있다는 기대감도 덩달아 커지기 시작했다. 다만 ST 법제화가 뚜렷한 진전을 보이지 않고 있어 업계는 눈치싸움만 이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사실상 업계가 기대감만 앞세워 시장을 망치려 한다는 비판이 적지 않다.

‘자산 토큰화’ 중요성 증대, ST 발행도 ‘활발’

지난 3월 굴지의 글로벌 자산운용사 블랙록의 래리 핑크 회장은 투자자들에게 서한을 보내 디지털 자산, 특히 자산 토큰화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당시 핑크 회장은 “디지털 자산 분야 기반 기술 중에서도 특히 자산 토큰화는 자본시장의 효율성을 높이고 밸류체인을 단축해 자산에 대한 투자자들의 접근성과 비용을 줄이는 역할을 할 것”이라고 힘줘 말했다. 핑크 회장이 자산 토큰화의 중요성을 강조한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해 11월 미국 뉴욕에서 열린 ‘뉴욕타임스 2022 딜북 서밋’에 참여했을 당시에도 “다음 세대의 증권과 시장은 자산 토큰화가 이끌어 갈 것”이라고 역설한 바 있다.

핑크 회장이 강조하듯 자산 토큰화, 이른바 ST에 대한 금융 업계의 기대감은 매우 크다. 글로벌 컨설팅 회사 롤랜드버거에 따르면 2022년 3,000억 달러(약 406조원) 수준이던 글로벌 ST 시장 규모는 2030년 10조9,000억 달러(약 1경4,257조원)로 35배 넘게 성장할 전망이다. ST를 견인하는 주된 원동력은 ST를 통해 기존 자본시장에 편입되지 못했던 실물자산까지 손쉽게 거래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이다. 이 같은 일이 가능한 건 ST가 분산원장 기술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분산원장이란 거래 정보를 기록한 원장을 특정 기관의 중앙화된 서버가 아닌 분산화된 네트워크에서 참여자들이 공동 기록·관리하는 기술로, 발행과 거래에 있어 기존 방식보다 자유롭고 간편하다.

실제 ST 발행도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올해 2월 독일 제조기업 지멘스는 6,000만 유로(약 860억원) 규모의 1년 만기 회사채 ST를 발행했다. 폴리곤 블록체인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한 지멘스 채권 ST는 중개업체 없이 발행됐으며 데카뱅크·독일중앙조합은행(DZ Bank)·유니온인베스트먼트 등을 통해 투자자들에게 직접 판매됐다. 별도의 서류 인증 과정도 필요하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ST 시장은 꿈틀거리고 있다. 금융위원회가 내년을 목표로 ST 발행 및 유통을 위한 법제화에 착수했으며 조각투자 업계 역시 이를 대비한 사업화에 분주하다. ST 시장 선점을 위한 증권사와 스타트업 간 합종연횡도 빠르게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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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영 하나증권 디지털본부장(왼쪽)과 박진혁 일루넥스 대표이사(오른쪽)가 특허 기반 STO 사업모델 개발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사진=하나증권

STO, 스타트업 新 ‘젖줄’ 되나

ST 시장이 급격히 성장하고 있다 보니 스타트업들 사이에선 ST가 새로운 ‘젖줄’이 될 수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금융당국 차원에서 ST 제도화를 추진하면 스타트업의 돈맥경화가 본격적으로 뚫리기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간 국내 스타트업의 주요 투자금 회수 창구는 기업공개(IPO)였다. 그러나 IPO는 평균 10년 이상이 걸리기 때문에 그전까지 유일한 자금 조달 수단은 투자 유치 정도에 머물러 있었다. 이에 대해 한 업계 관계자는 “발행사인 스타트업이 ST로 자산을 유동화해 현금화하는 등 투자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고 주주명부가 분산원장에 기록되기 때문에 투명성도 높아져 기존 투자유치 과정보다 시간과 비용을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다만 기업의 주식이나 채권 등 전통 자산을 기초로 한 ST 발행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비상장사인 벤처·스타트업은 명확한 기업가치 산정 기준이 없어서다. 배승욱 벤처시장연구원 대표는 “비상장기업은 기업가치를 계산할 객관적인 지표가 없다”며 “제도나 법을 잘 만든다고 하더라도, 불명확한 비상장 기업을 기반으로 발행한 ST에 대한 시장의 수요가 충분할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ST 법제화가 뚜렷한 진전을 보이지 않고 있다는 점도 문제다. ST 산업은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데 이를 다루는 제도는 자본시장법상의 투자계약증권 규정 및 ST ‘가이드라인’이 유일한 상황이다. 지난 7월 윤창현 국민의힘 의원이 ST 발행 제도 도입을 담은 법안을 발의했지만 국회에 계류 중인 상태고, 이에 따른 기업들의 눈치싸움도 격화하기만 한다. 업계 관계자는 “입법이 예상보다 늦어지는 데다 발행 과정 등 세부 내용도 아직 정해진 게 없어 대응하기 힘든 상황”이라고 고충을 토로했다.

일각에선 ST 발행에 따른 부작용에 대한 우려도 쏟아진다. ST 발행이 이전 코인 발행처럼 ‘돈 먹고 돈 먹기’ 식의 자금 마련 수단으로 전락한다면 결국 제2의 코인이 될 뿐인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 전문가들 또한 “ST를 발행해 돈을 챙기는 방식은 작금의 코인 시장과 진배없다”며 “ST가 차차 현금을 대체하는 형태로 유통되기 시작해야만 본격적인 생태계 변화가 일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업계 사이에선 생태계 변화 자체보단 그에 부수되는 잿밥에만 더 관심이 많은 상황이다. 당장의 이익 편취는 거위의 배를 가르는 행동에 불과하다. 눈치싸움에만 목매는 업계가 토큰 증권이 상장될 수 있는 인프라가 형성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태도를 먼저 보여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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