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격 상관 없으니, 제발 칩 공급 빨리”… ‘반도체 품귀’ 스마트폰까지 번졌다

글로벌 스마트폰업체 A사는 최근 동남아시아와 중동 지역에서 잘나가는 중저가 모델의 시판을 중단했다. 지난해 현지 판매량 ‘톱10’에 든 인기 기종이지만, 퀄컴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 부족 사태로 인해 제품 생산에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8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스마트폰용 반도체 세계 1위 업체 퀄컴의 칩 부족으로 인해 삼성전자, 샤오미 등이 스마트폰 생산·공급에 난항을 겪고 있다. 국내 스마트폰업체 고위 관계자는 “반도체 품귀 현상이 자동차산업에서 스마트폰으로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며 우려를 표했다. 퀄컴에 5G 모뎀칩을 의존하는 애플마저 영향권에 들었다고 알려져 있다.
원인은 공급 부족이다. 칩 수요는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으나, 생산이 이를 따라오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삼성전자, 샤오미 등 주요 스마트폰업체는 신제품을 경쟁적으로 출시해왔다. 시장조사업체 CPR에 따르면 글로벌 스마트폰 출하량은 지난해 6월부터 7개월 연속 전월 대비 증가세를 그려왔다.
코로나19 백신 개발 등에 따른 경기 회복 기대로 생산량을 크게 증가시키며, 스마트폰업체들의 반도체 AP 확보 경쟁이 시작됐다. 주문은 시장 점유율 세계 1위(2020년 출하량 기준 30.7%) 퀄컴에 몰려들었다. 퀄컴은 공장이 없는 팹리스(설계 전문업체)이기 때문에 생산을 대만 TSMC, 삼성전자 등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업체에 맡기고 있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에 다른 팹리스의 생산 주문도 파운드리에 몰려들며 주문이 1년치 이상 밀려 있는 상황이다. 퀄컴의 중급 AP 등을 생산하는 삼성전자 오스틴 공장이 한파로 최근 2주 이상 셧다운(일시 가동 중단)된 것도 공급 부족 사태를 심화시켰다.
TSMC 등 파운드리와 퀄컴 등 팹리스들은 제품·서비스 단가를 20% 이상 올리며 ‘공급자 우위’ 시장에서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 반면, 스마트폰 업체들은 초긴장 상태에 돌입했다. 샤오미 등 중국 스마트폰업체 고위 관계자들은 최근 “퀄컴 칩이 부족해 스마트폰을 못 만들 수 있다”는 우려를 제기한다.
AP 부족이 스마트폰 출하량 감소와 원가 상승으로 이어지며 시장에 찬물을 끼얹을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CPR에 따르면 스마트폰 세계 출하량은 지난 1월 전월 대비 6.0% 감소했다.
“올해 스마트폰용 반도체가 품절됐다. 그냥 모자란 게 아니라 ‘극심하게’ 부족하다.”
류웨이빙 샤오미 부회장(중국 지역 대표)이 지난달 24일 중국 SNS 웨이보에 게재한 글이다. 샤오미는 세계 3위(작년 4분기 기준 점유율 11%) 스마트폰 업체로 상당한 ‘바잉파워(구매 협상력)’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현재 샤오미는 스마트폰용 AP(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의 재고가 바닥난 칩이 들어가는 모델을 단종시키고 있는 상황이다. 업계에선 “반도체 쇼티지(품귀)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주는 사례”라는 평이 나온다.
8일 반도체업계에 따르면 스마트폰용 반도체 품귀는 차량용 시장만큼 심각한 상황이다. 시장조사업체 IHS마킷에 따르면 현재 차량용 반도체 리드타임(주문 후 조달까지 걸리는 시간)은 26~38주로 분석된다. 스마트폰용 반도체 리드타임도 이와 비슷한 정도다.
모델별로 차이가 존재하지만, 퀄컴의 스냅드래곤 AP 리드타임은 약 30주, 블루투스 칩은 약 33주인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 퀄컴에 주문을 넣을 경우 7~8개월 뒤에야 물품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세계 7위 스마트폰 업체 중국 리얼미 고위관계자는 최근 “퀄컴의 AP, RF칩이 바닥났다”고 밝혔다.
‘퀄컴 쇼티지’의 1차 원인으로는 중국 스마트폰 업체들의 공격적인 제품 출시가 꼽힌다. 세계 2위까지 치고 올라왔던 화웨이가 미국의 제재로 힘을 잃으며 샤오미, 오포, 비보, 리얼미 등이 공격적으로 세력을 넓히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카운터포인트리서치에 따르면 지난해 화웨이의 스마트폰 출하량은 1억8770만 대로 21% 감소했으나, 샤오미 출하량은 1억4580만 대로 전년 대비 17% 증가했다. BBK그룹 산하 오포, 비보, 리얼미의 연간 출하량 합계는 2억6270만 대로 삼성전자(2억5570만 대)를 처음으로 따라잡았다.
화웨이와 달리 샤오미, 오포 등은 반도체 개발 능력이 없기 때문에 미국의 퀄컴에 주문이 몰렸다. AP를 자체 생산하는 애플 역시 핵심 부품인 5G 모뎀칩은 퀄컴에 100% 의존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퀄컴은 생산시설이 없기 때문에 삼성전자, TSMC 같은 파운드리 업체에 생산을 맡긴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소비 시장이 점차 다시 활력을 띄며 AP뿐만 아니라 PC, 게임기, 인공지능 기기용 반도체 등을 생산해달라는 주문이 폭주했고, 퀄컴 칩의 리드타임이 30~33주까지 늘어났다.
삼성전자 미국 오스틴 파운드리 공장의 갑작스러운 ‘셧다운(가동 중단)’ 역시 공급 부족 사태에 기름을 부었다. 오스틴 공장에선 퀄컴의 AP, RF칩 등을 생산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퀄컴도 칩 부족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다. 크리스티안 아몬 퀄컴 사장은 최근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통신용 칩 부족이 연말까지 이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스마트폰 업체들은 대만의 미디어텍, 삼성전자 시스템LSI사업부 등에 AP 긴급 조달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으나 물량 확보가 쉽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미디어텍도 퀄컴처럼 자체 생산시설이 없기에 파운드리에 주문을 맡겨야 하는 상황이다. 삼성전자 역시 자사 스마트폰용 물량을 대는 것조차 쉽지 않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AP시장이 ‘공급자 우위’로 돌아서며 업체들의 희비는 극명하게 엇갈리고 있다. 퀄컴과 미디어텍 등 칩을 설계·판매하는 팹리스와 TSMC 등 파운드리 업체들은 15~20% 수준의 단가 인상에 나선 반면, 중국 스마트폰 업체엔 현재 상황이 ‘원가 상승’ 요인으로 작용한다. 업계에선 “칩을 확보할 수만 있으면 가격은 문제가 안 되는 상황에 몰렸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샤오미 등 일부 스마트폰 업체는 중동,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재고가 바닥난 칩이 들어가는 중저가 모델을 단종시켰으며, 재고가 남아 있는 칩이 들어가는 모델을 긴급 투입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스마트폰 생산량 자체가 감소할 것이란 우려도 제기된다. 시장조사업체 TSR에 따르면 지난해 6월부터 7개월 연속 증가(전월 대비)했던 글로벌 스마트폰 출하량은 올 1월 6.0% 감소했다.